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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혜암스님

나그네 15-08-21 08:31 ( 조회 4,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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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합니다. 문이 없는 것으로 법문을 삼아라 이 말입니다. 일체 모든 법이 나지 않고 일체 모든 법이 없어지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이 항상 어느 곳에든 나타납니다. 그래서 불법을 대도무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 없는 문을 타파하기 위해 모든 수행자나 재가불자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과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의 대명사인 혜암(慧菴ㆍ1920∼2001) 스님의 평소 법문이다.

문없는 문의 ‘대도무문’을 타파하기 위해 혜암 스님은 한평생을 장좌불와에 하루 한끼 공양으로 수행에 매진하였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하여 신도들을 멀리 했으며, 한겨울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정진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구법망구(求法忘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목숨조차 잊는다)의 정신으로 한 겨울에 구들장을 파버린 유명한 일화도 남기고 있다. 도반들과 더불어 여러 차례 결사를 한 것만 보더라도 스님의 수행정신을 읽을 수가 있으며, 종두(鐘頭) 소임을 볼 때 화두를 잡고 있느라 범종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평소 신념은 오직 한가지였다.

“공부하다 죽으리라!”

이 한마디만으로도 스님의 구도정신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혜암 스님은 출가이후 가야산 해인사 선원에서 안거한 이래 오대산 상원사와 오대(五臺), 희양산 봉암사, 금정산 범어사, 설악산 오세암, 태백산 동암, 팔공산 동화사 김당선원,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지리산 상무주암과 칠불암, 조계산 송광사 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 선사를 모시고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의 용맹정진을 하며 45 하안거(夏安居: 여름 안거)를 성만(成滿)하였으니 가히 본분납자(本分衲子)의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가야산 임굴(岩窟) 단식 용맹정진, 설악산 오세암 사지(死志) 고행정진, 오대산 사고암(史庫庵) 단식 고행정진 등은 대표적인 두타(頭陀) 고행정진이라 할 수 있다.

혜암 스님은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33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평소 한학을 비롯해 불교경전 탐독에 남다른 정진을 보였다. 일본에서 10년간 동ㆍ서양 종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스님은 26세 되던 45년 『선관책진』을 읽다가 발심해 출가한다.

스님은 46년(27세) 초여름,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하여 출가일로부터 1일1식과 장좌불와를 하며 용맹정진하였다. 초가을 무렵, 공양주(供養主)를 계속하며 행자(行者)로서 당시 가야총림의 조실이신 효봉 스님을 찾아 뵙고 ‘무()’자 화두를 결택받아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정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혜암 스님은 어느 날, 밥을 푸다가 대분심(大憤心)이 일어나 소임을 다른 스님에게 부탁하고 백련암 뒷편 환적대로 올라갔다. 환적 스님이 공부했다는 환적굴은 찾지 못했으나 다른 바위굴에서 “일주일 안에 도()를 깨치지 못하면 죽어도 좋다”는 결연한 각오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장좌불와하며 1주일 동안 삼매(三昧)에 들어 단식 정진을 했다. 그러나 끝내 도를 깨치지 못하고 해인사로 내려왔다. 이때, 해인사 대중들은 스님을 찾으러 가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이로부터, 스님은 “공부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50여년을 장좌불와하며 정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늦가을, 우연히 해인사에 들른 서옹 스님이 별스럽게 정진하고 있는 혜암 행자를 보고 퇴설당에 주석하고 계시는 인곡 선사를 친견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인곡 선사께서 행자를 보자 대뜸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혜암 행자는 “아 - 악” 하고 일할(一喝)을 하였다.

또, “네 고향이 어디냐?” 하시니, 행자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인곡 선사는 또,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셨다.

행자는 즉시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일원상(一圓相)을 그렸다.

인곡 선사께서 다시 물었다.

“우리집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서 말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의 넓적다리에 뜸을 떴다. 이 이치를 알겠느냐?”

그러자 마자, 행자는 주먹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에 인곡 선사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행자의 머리를 만져 주시고 상좌(上佐)로 받아 들였다. 스님은 46년 10월 15일 인곡 스님을 은사로, 효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성관(性觀)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스님은 수계하자마자, 구참납자(久參衲子)들의 용맹정진 도량인 퇴설당 선원에 방부를 들이려 하자, 갓 계받은 사미라 하여 대중들이 반대하였다. 그러자, 효봉 조실스님께서 “공부하는데 구참(久參), 신참(新參)이 어디 있느냐, 성관수좌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시자 대중들이 아무 말을 못했다.

가야총림의 퇴설당 선원에서 효봉 스님을 모시고 1일1식과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계속하며 동안거를 마친 스님은 47년(28세) 봄, 첫 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오대산 상원사로 가 한암 스님을 모시고 사부대중과 함께 봄 안거를 하였는데 종두 소임을 맡았다.

어느날 새벽, 화두 일념에 들어 종성(鐘聲)을 하였으나 종이 제대로 쳐지지 아니하였다. 이때 종소리를 묵묵히 듣고 계시던 한암 스님께서는 “저 수좌가 참으로 공부하는 납자(衲子)다”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스님은 상원사에서 봄 안거를 마치고 다시 가야총림으로 발길을 돌려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하안거 내내 용맹정진 하였다. 이때, 혜암 스님은 인곡 은사스님으로부터 강원에서 이력(履歷)을 보라는 가르침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생사가 무상(無常)한데 어느 겨를에 글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고 참선에만 전념하였다.

47년 가을, 혜암 스님은 해인사에서 성철, 우봉 스님과 함께 봉암사로 향하여 자운, 보문, 도우, 보안, 일도 스님 등 20여 납자와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結社)’를 시작하였다. 결사 대중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 선사의 가풍[百丈家風]에 따라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루에 땔 나무를 두 짐씩 하고 직접 경작과 탁발도 하였다.

혜암 스님은 이듬해 봄에는 김용사 김선대로 들어가 용맹정진 도중에 마음이 밝아져서 조사스님의 말씀에 걸림이 없게 되었다. 당시 해인사에 주석하고 계시는 인곡 은사스님을 찾아 뵙고 한결같은[一如] 공부의 경계(境界)를 말씀드리니 인곡 스님께서 물었다.

“옛날 덕산(德山) 스님께서 남방으로 가는 도중 점심을 먹으러 떡집에 들어가서 노파에게 ‘떡 좀 주시오’ 하니 노파는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이에 덕산 스님은 ‘금강경 소초(疏抄: 주석서)요’ 하였다. 그러자, 노파가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過去心 不可得), 현재심 불가득(現在心 不可得), 미래심 불가득(未來心 不可得)’이라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하겠오?’ 하고 물으니 덕산 스님이 아무 대답을 못했다 한다. 그러면, 너는 어느 마음에 점을 하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혜암 스님이 “저는 무조건 떡을 먹겠습니다” 하니, 인곡 스님이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 깨나 한결 같으냐)가 되느냐?” 하고 물었다.

“안됩니다” 라고 대답하니, 인곡 스님은 “그러면 더 부지런히 용맹정진 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혜암 스님은 다시 문경 봉암사, 해인사 퇴설당, 범어사 금정선원 등지에서 결사대중과 함께 용맹정진 하였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가야총림이 해산 되자 대중은 거의 흩어졌지만 스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계속 정진하였다. 51년(32세) 초봄, 은사인 인곡 스님이 스님의 공부를 점검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게송과 함께 ‘혜암당(慧庵堂)’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렸다.

 

다만 이 한가지 일을(只此一段事)

고금에 전해주니(古今傳與授)

머리도 꼬리도 없으되(無頭亦無尾)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느니라(分身千百億)

 

이 해 늦은 봄에는 해인사 주위에 공비가 자주 출몰하여 더 이상 정진하기가 어렵게 되자, 스님은 남으로 금정산 범어사에 당도하여 금어선원에서 동산 조실스님을 모시고 이듬해(52년) 하안거까지 용맹정진 하였다. 51년, 범어사 겨울 안거 때, 운허 스님이 보제루에서 능엄경 법회를 열었을 때의 일화다. 법회시간에는 학인뿐만 아니라 선원 대중도 모두 참석하였으나 혜암 스님은 1일1식, 장좌불와, 묵언하며 오직 면벽(面壁) 정진만 할 뿐이었다. 해제 때에 동산 스님께서는 “이번 철에 참으로 공부한 수좌는 혜암 뿐이다” 하시며 스님에게만 안거증(安居證)을 주었다. 52년 가을, 혜암 스님은 범어사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고 성철 스님이 정진중이던 통영 안정사 천제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혜암 스님은 이곳에서 성철 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하였는데, 신도들이 오지 못하도록 인법당(人法堂: 사람이 기거하는 작은 법당) 구들장을 파버리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삼동(三冬) 한철동안 좌복 하나만 가지고 정진하였다.

53년 봄,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강원도 지역에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때, 혜암 스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일념으로 고행정진하기 위해서 쌀 1되와 콩 1되만을 걸망에 짊어지고 적군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하나씩 통과하기도 했다.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천신만고(千辛萬苦)의 노력 끝에 간신히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러나, 방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바깥에서 생식으로 1일1식, 장좌불와하며 가을까지 용맹정진을 하여 더 심오한 삼매의 경지를 얻었다고 한다. 혜암 스님이 이와 같이 두려움 없는 사지(死志) 고행정진을 하였던 것은 두타납자(頭陀衲子)로서의 철저한 수행관의 발로였다. 스님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세암에서 두 차례나 더 용맹정진 하였다.

혜암 스님은 설악산을 떠나 오대산 적멸보궁에 참배하고 남방으로 행각하여 다시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 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하였다. 54년, 스님은 다시 북방으로 행각하여 오대산 서대(西臺)에서 일타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하며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배씩 일주일간 예참(禮懺: 참회기도)하고 금생에 기필코 ‘견성하여 중생을 제도할 것[見性度生]’할 것을 서원하였다. 그리고, 재차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일념으로 더욱 용맹정진하여 겨울 안거를 지냈다. 55년 늦은 봄, 스님은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옮겨 정진하였다. 동암에서는 57년 가을까지 2년간 용맹정진 하였는데 더욱 일여한 경지를 체득하여 크게 득력(得力)하였다.

57년(37)세 초겨울, 혜암 스님은 ‘공부하다 죽으리라’ 결심하고 오대산 사고암(영감사) 토굴에 들어갔다. 영하 20℃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추위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오직 잣나무 생잎만을 따먹으면서 초인적인 고행정진을 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대변이 나오지 않아 스님은 단식정진을 반복하고 나서 하루에 잣잎과 생콩 10알씩을 먹으며 정진하였다. 혜암 스님은 이 때에 수마(睡魔)를 완전히 항복받아 4개월 동안 한 순간도 혼침(昏沈)에 빠지지 아니하고 수면이란 본래 없는 것임을 확연히 체험하였다. 그러고 나서, 하늘과 땅, 남과 밤, 아침 저녁을 분간하지 못한 채 며칠동안 의심 덩어리[疑團]이 홀로 드러나[獨露]하더니 몰록 마음의 눈[心眼]이 열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迷則生滅心]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悟來眞如性]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 부수니[迷悟俱打了]

해가 솟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日出乾坤明].

 

67년에 해인총림 유나(維那) 소임을 맡은 스님은 그 뒤로 해인사 주지, 해인총림 수좌(首座), 해인총림 방장 등으로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경책했다. 해인사의 어른이 된 후에도 하루 한끼씩 먹는 일종식과 장좌불와를 평생 실천했다. 93년 성철 스님 열반 이후 방장에 오른 스님은 몸소 선승들과 함께 선방에서 수행을 함께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선방의 대중에게는 하루 4시간 이상의 취침을 금하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키게 했다. 또한 방선(放禪: 선수행 도중 잠깐 쉬는 시간)시간에는 백팔배를 거르지 않고 행하게 했다.

혜암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많이 먹지 말라”, “남을 도와라”, “감투를 맡지 말라”, “일의일발(一依一鉢: 옷 한 벌에 밥그릇 하나)로 살아라.” 등 다섯 가지의 가르침을 강조했다. 특히 스님은 어느 고승보다도 재가 수행자들을 위한 참선지도에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혜암 스님은 81년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을 개원하여 매년 여름 및 겨울 안거와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 철야 용맹정진 법회를 20여년 동안이나 주관하였다. 91년 봄부터 93년 가을까지는 해인사 원당암에서 안거하며 사부대중을 지도하였다. 96년에는 달마선원(시민선원, 108평)을 신축하여 이 해 가을부터는 원당암에 주석하며 매 안거마다 100여 안거대중과 200여 1주일 용맹정진 대중 그리고, 매월 500여 토요 철야법회 대중에게 참선을 적극 지도하고 점검함으로써 선()의 대중화, 생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용성(龍城)문도회장을 지낸 혜암 스님은 8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후 원로회의 부의장과 의장을 지냈으며, 99년에는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됐다. 조계종 개혁운동의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받았던 혜암 스님은 2001년 12월 31일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법랍 55세, 세수 82세로 입적했다. 스님은 이런 임종게를 남기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我身本非有]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心亦無所住]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鐵牛含月走]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石獅大哮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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